독후감

동경대전 - 나는 코리안이다 (도올 김용옥 저) [2]

COCl2 2022. 8. 3. 01:39

[1]에서 계속 됩니다.

읽으면서 표시해 둔 부분 다시 적으면서 복습합니다.

==================================

III 조선 사상사 대관 (저자의 종합적인 철학관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p256 다음으로 수학적 합리성은 특히 자본주의적 사회에 있어서나, 요즈음의 디지탈화된 정보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식에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며 인간의 삶을 매우 편리하게 만드는 온갖 기능이 있다. 이러한 평등성과 편리성의 측면만 가지고 이야기 하더라도 이성은 진실로 근대의 주체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항상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날카로운 배타를 수반한다. 그리고 과연 인간의 삶이 비이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의 지고한 가치가 될 수 있는가? 

합리성이라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인간의 총체성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현실 문제에 보착하게 된다. 합리성이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관념적인 것이다. 관념적 진리의 기준은 ... 절대적인 그 무엇이 되기에는 너무도 편협하거나, 비현실적이거나, 독단적일 수 있다.

 

합리성은 자신의 광기를 합리로 인식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자신의 판단력 이외의 모든 것을 비합리 광기로 모는 그 판단력이야말로 광기라는 것을 인식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합리는 무서운 보수적 독단의 옹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희랍철학으로부터 존중시되어운, 프로네시스 phronesis prudence 즉 사려, 분별, 지혜, 슬기로움의 뜻을 지니는 ... 럿셀경이 문명과 야만을 기르는 기준으로 삼은 이 프로네시느는 결코 합리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총체적 행위는 수학적 합리성보다는 보다 포괄적이며 개방적인 느낌의 체계를 요구하는 것이며, 협의의 수학적 계산능력보다는 오히려 정감의 발출이 인간존재의 삶을 결정하는 보다 본원적인 함수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심미적 인 aesthetic sensitivity, 자사의 희노애락, 맹자의 사단, 조선유학자들의 사단칠정 논변...

 

p258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의 함의는 ... good sense라 표현했으며, 그 말 속에는 감성적 측면을 포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옳게 판단하는 양식이었으며 진리를 분별하는 힘일 뿐이었다.

 

p260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리, 다시 말해서 인간이성의 추론에 의한 우주에 관한 명백한 결론이, 종교적 독단과 권위에 의하여 억눌리고 자의적으로 곡해되는 상황을 그의 시대의 가장 참혹한 현실이라고 감지하였다. 실체개념을 도입하였다... 실체란 자기 존립을 위하여 자기 이외의 어떠한 타자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 (substance)이다. 물질이라는 실체와 정신이라는 두 실체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연장의 속성을 갖는 물질의 세계와, 사유를 속성으로 갖는 정신의 세계의 자기원인적 성격을 실체의 관념을 통해 확보함으로써, 종교과 과학, 신부와 과학자간의 싸움을 종식시키기를 데카르트는 갈망했던 것이다.

 

p264 수학적 합리성을 근대의 주요기준을 삼는 근대성의 프로젝트는 인간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대립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을 전제로 할 때만이 성립하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근대라는 합리성의 프로젝트가 과학을 산풀하는 데 역사젓으로 일정한 기여를 했을 지는 모르지만, 과학은 더 이상 그러한 근대프로젝트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근대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합정리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존재에 있어서 리는 결코 정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을 결여하는 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학적 합리성도 결국 사단칠정이라고 하는 인간의 심적 현상의 토탈리티 속에서 고려되어야 마땅하다. 시비지심의 순화된 한 형태로서 우리는 수학적 능력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p268 근대라는 개념자체가 고대 중세 근세 현대라고 하는 분절적인 단계발전적사관을 전제로 한 것이며, 이러한 사관은 직선적인 시간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직선사관은 창조론에서 종말론에 이르는 종교적 구속가솬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다. 이러한 직선적이고 단계적이며 구속적인 틀 속에서는 도저히 동학이 말하는 '개벽'이라는 이념을 이해할 길이 없다.

 

p270 희랍민주주의와 근대민주주의를 차별화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개인 인권 자유와 같은 개념의 유무에 있다. 근대적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누건과 자유를 보호하는데 그 일차적 소이연이 있다고 할 것이나, 희랍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인권이나 자ㅠ보다는 폴리스라는 고동체의 공동선에 개인을 철저히 복속시키는 데 그 일차적 소이연이 있다. 따라서 희랍인들이 자유라고 보르는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억압에 해당하는 것이다.

 

p276 공자는 모든 인간이 주어진 현실적 제약이나 직분 속에서라도 인간다웁게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의 가능성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거이 그가 말하는 정명의 정치였다. 그것이 바름의 정치였고, 그 바름에 분명히 보편적 인간의 지향성이 있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정명사상을 혁명사상으로 발전시켰다. 

 

p278 하나님도 얼마든지 인간사회의 공동선에 대학 유익 무익에 따라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존재의 존엄성의 기반이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맹저의 최후의 결론을 이와같이 내린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며,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들을 뿐이다. ... 하늘의 소리는 오직 민의 소리일 뿐이요, 하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일 뿐이요, 하늘로부터 명하여지는 모든 권력은 백성이 명하는 권력일 뿐이다.

 

p282 고자의 주장은 순자로 이어졌으며, 인간의 선함이 본성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상황이나 교육에 의하여 그렇게 형성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성악의 존재로 규정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본성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본체계나 초월계, 그리고 신적인 인격체를 위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자나 순자는 성악을 말한 적이 없으며 성불선만을 말했을 뿐이다. 

 

플레타르키아 Pletharchia 민본성, 민본주의

 

맹자적 플레타르키아의 출발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 기술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온전한 선함의 긍정이다. 이러한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인간의 함양! 인간의 불선한 현실은 오로지 인간의 선단을 확이충지하는 긍정의 프로세스를 통해서만 극복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바, 그 기가 천지기간 꽉 들어차는 호연지기의 대장부야말로, 단순한 대인이 아니라, 그것은 신적인 인간이며, 성선의 당영한 귀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p284 모든 정치적 리더십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가치는 살아있다.

 

p289 경연은 매일 2.3번 실시되었으며, 그 경연의 내용은 고전이나 의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명한 시국에 관한 모든 정치적 잇슈를 포괄하였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 사이에서 꾸준히 민권이 성장해간 역사라고 볼 수 있다.

 

p290 인류사상사에서 불교처럼 다양한 문화영역과 사고영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주제도 없기 때문에 불교를 한마디로 축약해서 논의하기 어렵다.

 

p292 불교의 무아론은 개인주의의 철저한 부정인 동시에 개인주의의 철저한 긍정이라고 하는 모순된 양명을 항상 지니게 되는 것이다.

원효사상에는 통일신하의 새벽의 낙관주의가 갈려있는데 비해, 지눌사상에는 고려중기사회의 말법적 비관주의가 깔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는 계급없는 사회를 꿈꾸었으나 정도전은 종교없는 사회를 꿈꾸었다. 종교라는 권위조직의 속박이 있는 한,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진정한 플레타르키아의 사회는 도래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p297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퇴계가 그의 리기론적 심성론을 통하여 구성해 놓은 고도의 동.서문명의 융합수준을 20세기 조선역사에 있어서의 동.서문명의 다시 만남의 과정이 아직도 달성치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충격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p301 퇴계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낙관적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도덕적 본성이 능동적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닥 보았던 것이다. 

율곡은 예리한 현실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기에 대한 중시는 결국 현실에 대한 비관적 정조를 깔고 이;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율곡에서 송시열에 이르는 서인.노론계열의 주기론적 철학은 정통귀족관료의 현실주의를 반영하는 거일 수 있다.

 

p302 퇴계는 강력하고 능동적인 기에 의하여 리가 일방적으로 제약받고, 추상적이고 수동적인 그 무엇이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엇던 것이다. 리가 관념적이고 추성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내용을 함유하는 리얼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p320 동학과 태쳥천국을 비교하여 보면, 조선역사의 유교적 합리주의의 치열한 논리의 연속성과, 그 축적된 인간지성의 승리, 플레타르키아의 꾸준한 확대에 의한 폭발적 힘의 위대성을 감지하게 된다. 혁명은 결코 일시적 광분이나 광기로써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학을 리드해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조차도 냉혹한 이성의 대해로 귀속시키는 차분한 역사적 비젼이 자리잡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이념은 외래적인 서학 그 자체였다. 동학의 이념은 내래적인 거시며 주체적인 것이며 창조적인 것이며 새로운 것이었다. 태평천국은 선악이원론의 원리에 따라 요마를 설정했고, 그 요마는 만청이었다.

 

동학또한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에 대한 강력한 불만을 품고는 있었지마는 조선사람이라는 아이덴티티의 분열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동학은 다시 개벽을 말하지만 기존의 문화관습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p324 동학은 종교운동이 아니었다. 동학이 평범한 종교운동으로서 전화한 것은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하고 종교로서 선포한 1905년 12월 1일 이후의 사건이었다. 그 이전의 동학도들은 자유로운 활동의 결사체엿으며, 조직윤리에 개인윤리를 복속시키는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엇다. 그들은 동학을 한다고만 말했으며 동학을 믿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p327 수운이 말하는 다시개벽은 신의 섭리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기적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전면적으로 즉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p330 근대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운동이 50년 이상 동안 내분이나 분열없이 다시개벽이라는 단일한 이상적 가치를 위해 30만며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순결하게 헌신한 사례를 이 지구상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만큼 도학은 위대했다.

 

동학의 샤머지늠은 철저히 수평적이다.

 

p332 신학자 김경재는 수운의 신관을 유신론과 범심론을 극복한 범재신론 panentheism이라고 규정한다.

 

p337 합정리적 판단이란 토톨로기라는 특수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삶의 판단을 지친하는 한, 어떠한 신념을 도달하는데 있어서 가능한 많은 타당한 증거자료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획득항 수 있는 과정을 개방적으로 거치는 습관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p340 동락은 고조선의 부활이다. 그것으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국가체제의 부활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가장 완만하고도 개방적인 질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홍익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 조선민중은 지금 세계사의 최전위에서 걸아가고 있다.